Acta fabula
ISSN 2115-8037

2026
Mars 2026 (volume 27, numéro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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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yong Kim

한국전쟁 시기 민간인 학살 유족의 자서전 분석 - 고발의 정치로서 가족이야기 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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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인 학살과 자서전 문화

1한국전쟁 전후 시기 민간인 학살 관련 유족들 가운데 일부는 자신들의 개인 역사나 생애사를 정리한 자서전이나 전기를 발행했다. 자서전이나 전기는 구술증언이나 자신이 직접 집필한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민간인 학살 유족들의 자서전이나 전기는 개인의 트라우마적 경험이나 기억들이 이야기화되고 텍스트화된 의미를 담고 있다. 한국의 민간인 학살 관련 유족들에게 자서전이나 전기 문화는 일반적이지 않다. 자서전이나 전기 문화가 갖는 사회경제적 조건이나 문화적 취향을 고려할 때 민간인 학살 관련 유족들이 자서전을 쓰는 것은 쉽지 않다. 민간인 학살 유족들의 자서전은 과거 국가폭력의 문화가 제대로 청산되지 않은 조건에서 자신들의 말할 수 없었던 과거를 말한다는 점에서 고통스러운 작업의 결과이다. 현재 유족들이 자신의 생애사 전반을 기록한 자서전은 손꼽힐 정도이고 직접 집필한 경우보다 구술증언으로 편찬된 경우도 있다. 국가폭력이나 민간인 학살 연구에서 자서전이나 전기가 갖는 의미는 일반적인 구술증언과는 차이가 있다. 한국에서 2000년대 들어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 작업이 본격화되면서 다양한 사건과 주제에 대한 구술증언이 풍부하게 이루어 졌다. 특히 국가가 각종 과거사위원회를 설치하여 사건의 진실을 규명하면서 피해자들의 구술증언은 제도적 합법성을 얻게 되었다. 구술증언은 지금까지 국가권력에 의해 억압받거나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했던 피해자들이 자신들의 개인적 경험과 고통을 국가의 공적 영역에서 사회적 진실로 공식화하는데 기여했다. 그러나 민간인 학살 유족들의 구술증언은 국가의 진실규명 작업에는 기여하였지만, 한편으로 피해자 개인들의 생애사 또는 생활사 차원에서 접근할 때, 많은 한계를 안고 있다. 유족들의 증언은 주로 학살과 관련된 피해사실의 입증에 집중되어 있다. 자연히 진실규명이나 과거청산이라는 거대담론에 지배되어 피해자의 일상적인 생활과 경험, 상실과 고통, 좌절과 분노 등 개인을 둘러싼 이야기는 축소되거나 주변화되었다. 국가폭력이나 피해사실 확인이라는 현재적 관심이 우선되면서 피해자 개인의 삶이나 역사보다는 진실규명이나 국가폭력을 폭로하는 피해사실이 중시되었다. 여기에서 피해자의 구술증언은 국가폭력을 입증하는 증거자료로서의 성격이 강했다. 이에 비해 유족들의 자서전이나 전기는 피해자 개인들의 생활과 경험, 역사 속에서 자신의 고통과 가족, 사회와 국가폭력의 문제를 볼 수 있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바로 생애사 측면에서 학살이 개인의 생활과 심성세계에 끼친 영향, 그리고 기억의 측면에서 학살에 대한 기억의 지속성과 현재성을 살펴 볼 수 있다. 지금까지 민간인 학살 관련 유족들의 구술증언에 대해서는 비교적 많은 연구가 진행되었으나, 유족들의 자서전에 대해서는 분석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유족들의 생애사 전체를 다룬 자서전이나 전기는 과거청산운동이 본격 등장하던 2005년 이후부터 매우 제한적으로 간행되기 시작하였다. 이 글에서는 민간인 학살 유족 가운데, 서영선, 여기원, 박희춘 세 명의 자서전을 분석하려고 한다. 여기에서 서영선의 책은 자서전에 해당하며, 여기원과 박희춘의 책은 "민중구술열전" 곧 열전(列傳)으로 표현하고 있듯이, 비록 구술증언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개인의 과거 경험과 역사를 다룬 전기(傳記)이다. 이들 자서전이나 전기는 민간인 학살과 관련된 특정 사건에 대한 증언이나 이야기가 아니라, 개인의 생애사 또는 전기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분석대상은 이들의 전체 생애사에서 주로 민간인 학살과 관련된 기억과 이야기이다.

2이들은 모두 유년 및 청년시절인 한국전쟁 직후에 부모나 가족이 학살당한 사건을 체험한 유족으로서 경험의 공통성을 갖고 있다. 이 글은 유족들의 자서전에 나타난 개인들의 생애사를 통해, 피해자 개인이 과거에 대한 침묵과 적응을 거쳐 정체성을 자각하고, 궁극적으로 국가 폭력에 분노하는 저항의 주체로 형성되는 과정을 분석하려고 한다.

현재의 기억으로서 가족의 역사

3민간인 학살관련 유족들의 자서전이나 전기는 서사 구조에서 과거의 트라우마적 기억들을 텍스트에서 이야기하고 재현하는 특징을 갖고 있다. 이들 자서전에서 특징은 첫째 기억하기나 이야기하기, 내러티브의 주체가 비록 자신이지만, 중심은 여전히 가족이나 부모이다. 부모의 피해가 가족과 자신에게 전이되고 전승되는 이야기 구조를 갖고 있으며, 피해도 개인이 아닌 가족의 피해로 귀결된다. 유족들에게 부모나 가족은 자신의 과거와 트라우마를 표현하는 언어세계의 중심이다. 자서전이나 전기의 이러한 글쓰기, 이야기하기의 구조는 부모의 희생은 유족들의 인생에 커다란 상처가 되었던 사실과 관련이 있다. 서영선은 "엄마를 생각하며 얼마나 속으로 울었는지 모른다"고 하면서, "엄마가 살아 계셨더라면 동생도 죽지 않고, 우리 5남매는 헤어져 살지 않았을 것"이라고 이야기하였다. 박희춘도 아버지의 희생은 가족 뿐만 아니라 "내 인생에서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으며, 아직도 아버지 이야기만 나오면 "횡설수설"하고 방황한다고 말하였다. 그는 그 때 "아버지가 그런 일이 없었으면 나도 참 어떻게 다른 삶을 좀 살았을 수도 있는데......" 라고 덧붙였다. 둘째로 자서전에서 가족의 역사는 지나간 과거가 아니라 여전히 자신의 일상생활에서 재현되는 살아있는 현재의 역사이다. 유족들은 대개 직접 피해자가 아니고 어린이 또는 청소년 생존자의 특징을 갖고 있으며, 성인의 입장에서 과거 유년기의 기억을 자서전에서 쓰거나 이야기하고 있다. 유족 자서전은 과거기억, 곧 어린이 또는 청소년기의 기억이 현재의 시점에서 조정된 특징을 보이고 있다. 곧 기억의 현재화에 따른 강력한 지속성을 여전히 보여주고 있다. 유족들은 부모가 경찰이나 당국에 끌려가던 모습, 그리고 부모를 만나거나 찾아다닌 일, 부모의 시신을 찾기 위해 돌아다닌 일을 현재처럼 기억하고 있고, 현재에도 여전히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4여기에서 바로 기억하기의 선택적 성격이 일정하게 나타난다. 유족들에게 과거기억은 상처이다. 자서전을 쓰는 것은 자신의 과거에서 의미 있는 패턴을 발견하거나 창조하는 것인데, 이러한 패턴에 따라 기억은 선택될 수 있다. 유족들에게 바로 가족은 기억의 장소로서 자신의 고통스러운 과거와 현재의 삶을 말해주는 이야기의 출발점이다. 따라서 현재에도 가족의 모습이나 가족과 헤어졌던 장소는 여전히 자신의 기억에서 상상되고 재현되는 곳이다. 유족들에게 가족은 과거 경험과 고통을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기억의 장소이다. 서영선은 어린 시절 어머니와 헤어졌던 광경을 여전히 상기하고 있다. 그는 "12월 말경에 우리 집에 복면을 한 기동대 세 놈이 와서 어머니를 끌고 갔다. 내가 저만치 따라 나가니 들어가라고 소리친다. 나는 그만 무서워서 들어올 수밖에 없었고 이것이 어머니와 우리 5남매와의 마지막이 되었다" 라고 쓰고 있다. 서영선은 이후, 어머니를 비롯한 사람들이 갇혀 있는 양조장으로 갔지만 무서워서 들어가지 못하고 돌아왔는데, 이 행동은 반세기가 넘은 지금까지 후회로 남아있다고 적고 있다. 여기원도 아버지가 일을 당하셨을 때가 열여덟인가 열아홉 살이었는데 아직까지 시신도 찾지 못했고 "지금도 한"이라고 말하였다. 박희춘은 당시 순경이 와서 아버지를 데리고 갔고, 다음날 경찰서로 가서 아버지를 면회했다. 그는 당시 아버지를 죽일 것을 조금이라도 예상하지 못한 것이 내가 아직 가슴에 한이 된다고 얘기하였다.

5피해자 개인들의 트라우마적인 기억 속에서 과거는 단순히 끝나거나 지나간 역사가 아니다. 그것은 경험적으로 남아서 자신과 공동체를 따라 다니며 지배한다. 서영선의 이야기처럼, 유족들에게 어린 시절 겪었던 모든 일들은 "생생한 모든 나의 기억 속에서 한시도 잊을 수 없었던 일"이 되었다. 서영선에게 부모와의 이별은 어린 시절의 '지울 수 없는 상처로서 영상으로 뚜렷이 각인되어 쌓이는 슬픔'이었다. 유족들은 학살에 따른 가족이나 부모와의 이별 속에서 가족의 생활을 일정하게 책임졌다. 가족 이외에 어느 누구도 유족들의 고통을 함께 나누지 못했다. 국가는 가해자로서 자신들을 감시하고 통제하였고, 어려움을 호소할 대상은 아니었다. 유족들은 국가만이 아니라 이웃이나 친척과 같은 사회로부터도 고립되었다. 서영선의 경우, 친척도 많이 살았지만 전쟁 직후 모두가 어려운 상황이었기 때문에 도움을 주지 못했다. 서영선은 당시 "큰집도 치안대들이 양식을 모두 빼앗아갔기에 얻어먹을 것도 없어 너희들이 따로 구해 끓여 먹으라고" 하는 상황에서 아무 곳에도 기댈 곳이 없었다. 유족들은 현실적인 생활만이 아니라 자신들의 억울함과 고통을 공유하거나 이야기할 수 있는 공간은 가족밖에 없었다. 국가나 사회가 학살을 부정하거나 외면하는 상황에서 가족은 유족들의 상처를 함께 이해하고 아파해 있는 거의 유일한 장소였다. 이는 유족들이 가족을 중심으로 집단 정체성을 형성하고 국가에 대항하여 희생자 의식을 형성하는 배경이 되었다. 결국 유족들은 가족이나 부모의 부재 속에서 스스로 생활을 유지하고 가족의 공간을 지켜 나갔고, 이는 가족 간의 유대감과 결속력을 유지하는 원천이 되었다. 유족들에게 가족은 학살을 주도하거나 방관했던 국가나 사회에 대항하는 생활 공동체였다.

침묵과 적응, 그리고 저항의 내면화

6민간인 학살 유족들의 자서전에는 국가폭력에 대한 개인의 저항과 침묵, 그리고 사회적 적응이 그려져 있다. 유족들은 대부분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었고 국가폭력이나 가해자에 저항하기 어려운 불가항력의 상태에 있었다. 이러한 조건에서 유족들의 국가폭력이나 가해자에 대한 저항은 내면화되었고, 억울함과 분노는 억눌려 있었다. 유족들은 사건당시 국가폭력에 저항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서영선은 당시 어머니가 우익 특공대에 끌려가자,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만나려고 사람들이 사람들이 갇혀 있는 양조장으로 갔지만 무서워서 들어가지 못하고 돌아왔다. [...] 사건 당시 학살이나 국가폭력을 경험한 유족들은 무력감에 시달렸다. 유족들의 국가폭력에 대한 두려움은 침묵으로 이어졌다. 서영선은 이후 병원에 취직하여 일상적인 생활을 하였지만, 두려움 때문에 부모에 대해서는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박희춘의 경우도 아버지의 학살, 죽음을 경험하면서 무력감과 자책감에 시달렸고 방황했다. 박희춘은 '아버지의 죽음을 자신이 어떻게 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아쉬움' 느끼면서 "상당히 방황을 하기 시작"한다. 처음에 이러한 갈등과 방황은 국가나 가해자에 대한 반발이나 저항으로 표출되지 못하고 내면화된다. 박희춘에 따르면, 당시 '지역 특성도 있었지만 사람들에게는 빨갱이 얘기나 아버지 죽음에 대한 얘기를 나눌 있는 용기가 전혀 '었으며, 아버지 죽은 얘기를 하면, 다른 사람들로부터 "끌리 가서 죽는다", " 살아난다" 얘기를 들었다.

7유족들의 두려움과 무력감, 그리고 침묵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유족들의 침묵이 물론 국가폭력에 대한 순응이나 동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유족들에게 침묵은 사회적 적응과 생존의 형태였지만, 한편으로 저항의 내면화, 말하지 않는 저항이기도 했다. 여기에서 유족들의 침묵이 갖는 양가적이고 복합적인 의미, 표면적 적응과 내면적 저항의 관계를 생각해 있다. 저항이 내면화되면서 적응은 적극화되었다. 국가폭력을 당한 민간인 학살 관련 유족들의 생애사를 보면, 역설적으로 국가나 사회에 적응하고 순응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어떤 점에서는 부적응보다는 과잉적응의 경향이 보인다.

8서영선의 경우는 부모가 희생된 상황에서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주경야독하고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서영선은 자신 혼자만이 아니라 동생들을 위해 돈을 벌고 공부를 시켜야 하기 때문에 적극적인 사회생활을 하였다. 박희춘의 경우는 당시 전쟁 속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군대를 기피하는 상황에서, 굳이 가지 않아도 되는 군에 지원 입대했다. 박희춘이 군대에 지원하자, 사람들로부터 상식 밖이라는 말과 함께 미친놈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군에서 성실히 근무했는데, "빨갱이 잡아서 훈장 받았"으며, 결과 청도 6.25 공로자 충혼탑에 이름이 커다랗게 새겨지기도 했다. 이는 박희춘 개인의 생애에서 , 유족으로서의 과잉적응이자 자아가 충돌하는 지점이기도 했다. 박희춘은 이에 대해 " 애비는 빨갱이 하다 축었고", "아들은 빨갱이 잡았다고 훈장 받고" 라고 표현하였다. 유족들에게 나타나는 이러한 과잉적응은 예외적 대표성을 갖는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비록 과거 민간인 학살과 관련된 후손들의 증언이나 전기에서 반공정책에 적극적인 모습을 찾는 것은 쉽지 않지만, 유족 내부세계에서는 일반적이고 대표성을 갖는 현상이었다. 유족들은 과거 좌익이나 빨갱이로 몰렸던 반공사회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도 정부정책에 협력적인 태도를 보여주어야만 했다. 여기원도 지역사회에서 인정받으려고 열심히 일했다. 그는 1960 5.16 쿠데타 이후 사회활동에 적극 참여하여 농촌지도자 성주군연합회 회장, 연합회 운영위원 등을 여러 차례 역임했으며, "현재도 반공투사까지는 몰라도 반공주의자라는 " 듣고 있다. 이러한 모습은 당시 분위기에서 평범한 사람의 일상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유족들이 국민으로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인정받으려고 노력했던 의식세계를 보여준다. 이는 자서전이 지닌 특성, 자기의식이 강한 이야기하기의 형식, 또는 경험의 번째 읽기를 보여준다. 유족들은 자서전이나 전기에서 이야기하기나 증언을 통해 자신의 과거경험이나 기억을 다시 해석하고 정의하였다. [...] 이들은 내면세계에서 빨갱이라는 이름으로 학살당한 부모의 자식이라는 자기의식을 항상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적응하고 한편으로는 반발하는 자기모순을 이야기할 있었다. 유족들에게 나타나는 과잉적응이 유족으로서 정체성이나 의식의 상실, 국가폭력에 대한 불만이나 저항의 중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여전히 적응과 저항 사이에서 동요하고 갈등하고 있었다. 박희춘의 경우, 시기 일본으로 밀항하려고 돈을 모으기도 했다. 밀항은 크게 보면 현실세계로부터의 탈주나 도피이지만, 박희춘에게는 사회에 대한 불만과 저항의 다른 표현이었다. 박희춘은 밀항의 동기에 대해, 아버지 죽음, 저항과 보복적 심리, 경찰에 대한 불만, 지역사회에 대한 반발 등이 작용하였다고 이야기하였다.

유족으로서의 정체성과 희생자 의식

9민간인 학살 관련 유족들은 처음에 유족으로서의 정체성을 놓고 내면적으로 갈등하였고, 이는 희생자 의식을 계승하는 형태로 발전하였다. 유족들의 정체성은 빨갱이 자식이라는 사회적 낙인 속에서 형성된다. 유족들은 연좌제의 적용을 받았고, 사회생활에서도 요시찰 대상으로 분류되어 국가의 사찰에 시달렸는데, 이는 유족으로서의 정체성과 집단기억을 형성하는 원천이 되었다. 사실 자서전은 사회적 기억의 한 형태이다. 자서전에서 개인들은 자신들의 삶과 관련된 이야기들을 말하고, 한편으로 사회적으로 관련된 사건을 규정하기 위해 개인적 기억들을 동원하기도 한다. 유족들은 자서전에서 자신들에 대한 사회적 차별과 감시를 공통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서영선의 경우, 1961년 박정희 정권의 초기에 언니와 함께 직장에 다녔는데, 항상 경찰이 감시하고 찾아와 괴롭혀서 직장을 다니기 어려웠다. 유족들은 정부정책에 적극 협력하고 사회에 적응하려고 노력했지만, 여전히 정상적인 국민으로 취급 받지 못했다. 여기원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여기원은 군에 배속된 동생의 신원조회 문제를 해결하려고 "송아지 한 마리 값"을 들이는 곤욕을 치렀다. 그럼에도 동생은 제대한 후에도 여전히 "이등 국민", 자신은 "삼등 국민"의 대접을 받았다. 그는 외국 나가는 것도 어려웠고 공무원 취직 같은 것은 생각조차도 안 했다. 유족들은 여전히 불순한 비국민으로서 감시와 사찰의 대상이었던 셈이다. 유족들은 자신들에게 씌워진 사회적 낙인을 지우기 위해 사회활동에도 적극 참여했으나, 비국민의 경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여기원은 정부정책에 적극 참여하여 외국농업시찰단에 포함되었으나, 신원조회에 걸려 제외되었다. 그는 "참 나라를 위해서 다년간 열심히 노력을 했는데 나를 이 대접"하는 것을 보면서, "애국심이 싹 없어지는 거라"고 말하였다. 박희춘의 경우도 사회에 적응하고 정부정책에 적극 협력했지만, 항상 여전히 유족으로서 의식을 갖고 있었다. 박희춘의 내면세계에서는 유족으로서 자신과 현실에서의 자신이 충돌하였다. 박희춘의 이러한 갈등은 일찍부터 나타났고, 이는 아버지의 죽에 대한 일종의 복수로 나타난다. 그는 헌병학교에 합격하자, 아버지의 살해와 관련된 호림부대 정보원 정O기를 찾아내서 아버지를 죽인 이유를 물었다. 그는 이 과정에서 정O기에게 욕설과 구타를 퍼부었다. 박희춘의 이러한 행동은 정O기가 부친이 죽은 이유에 대해, "니 애비가 빨갱이를 해 가지고 그랬지"라고 한 발언에 자극 받은 것이었다. 박희춘은 아버지에 대한 복수심과 함께 직장 생활 속에서 유족으로서의 정체성을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군대에서 제대한 후에 공무원시험에 합격하지만, 부친이 '보도연맹원으로 6.25 당시 행불된 자'라는 이유로 발령이 나지 않았다. 그는 아무 죄 없이 부친이 죽은 것도 억울한데 연좌제 때문에 공무원으로 나갈 수 없다는 사실이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그는 군대에서 6.25 참전용사로서 훈장까지 받았던 자신의 과거를 돌이켜 보면서, 이때부터 "소위 반정부적인 반체제적인 그런 인격으로 성장"했다. 그는 "정부에서 뭐하는 일이 있다 카만 이거는 또 다 또 거짓말이다,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박희춘은 "공식적으로 내 아버지는 빨갱이 하다가 죽었고, 나는 군에 있으면서 빨갱이 잡아서 훈장 받았"다는 상호 모순되고 대립되는 사실에 갈등하였다. 그는 "이기 도대체 안 맞단 말이지" 라고 말하였다. 자서전에 나타나는 여기원과 박희춘의 이야기하기는 모순되고 분열된 자아에 회의하고 유족으로 자신의 세계를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이는 피해자들이 트라우마적 경험을 이야기함으로써 자신들의 파편화 된 세계를 재설정하는 중요한 계기를 만드는 행위로 볼 수 있다. 이러한 내면적 갈등과 모순은 유족으로서 자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희생자 의식을 계승하는 지점에서 조정될 수 있었다. 박희춘은 실제로 자신의 뿌리에 해당하는 아버지의 죽은 이유를 찾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는 경찰서에 찾아가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서류를 내놓으라고 시위를 벌이다가 쫓겨나기도 했다. 국가의 정책과 사회적 시선은 유족들이 희생자 자식으로서 자아와 자신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고민하게 만들었다. 이처럼 유족들의 정체성은 단순히 개인의 내면적 성찰의 결과가 아니라 외부 세계, 국가나 사회와의 관계 속에서 형성되었다. 유족들에 대한 감시와 낙인 찍기는 유족들이 타자인 국가에 대항하여 자신들의 정체성과 의식을 형성하고 사회적 연대를 추구하는 토양이 되었다. 개인적 수준에서는 가해자 복수하기나 가해자 찾기, 그리고 사회적 수준에서는 진상규명을 위한 유족회 결성이나 관련 단체에서 활동하는 형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