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ta fabula
ISSN 2115-8037

2026
Mars 2026 (volume 27, numéro 3)
titre article
Yeom Mu-woong

김수영은 어떻게 ‘김수영’이 되었나

염무웅, « 김수영은 어떻게 ‘김수영’이 되었나 »,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 서울, 창비, 2024.

Lire en VF

1*2021 1120 서울 도봉구의 김수영문학관에서는 ‘다시, 100년의 시인김수영학을 위하여라는 표제 아래 김수영 시인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학술대회가 열렸다. 나는 행사에서 기조 발제로김수영이 수행한 문학사의 전환이란 제목의 강연을 했다. 다음은 그날의 강연 내용을 보완하고 제목을 바꾼 글이다

생전의 김수영, 사후의 김수영

2김수영(金洙映, 1921~68) 문학에 대한 사회적 성가(聲價)올해 탄생 100주년을 맞으면서 최고조에 이른 느낌이다. 문단과 학계 · 출판계를 넘어 일반 언론까지 그를 특별하게 기리고 있다. 근대문학 역사상 이런 일은 아마 처음일 것이다. 과거 일제강점기에는 이광수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사회적 명망을 누렸고 해방 후 독재정권 시대에는 김동리 · 서정주가 문단을 넘나드는 지명도에 이르렀으나, 그들 모두는 어딘지 관제의 냄새가 났다. 오직 자신의 글과 품위만으로 살아생전 그런 위치에 오른 작가는 아마 박경리(朴景利)가 유일할 텐데, 대하소설 『토지』가 문학성과 대중성을 겸비한 대작인 데다 여러 차례 텔레비전 드라마로 방영됨으로써 문단 바깥의 사회적 지원에 힘입은 바도 크다할 것이다. 김수영의 특이한 점은 생전이 아니라 사후에, 그것도 적지 않은 세월이 지나는 사이에 결국 더 그런 위상을 가지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면서도 그 자신의 본업인 시에서는 여전히 미지의 부분이 많이 남아 있는 듯한 시인이 김수영이다. 오늘처럼 그를 논하는 자리가 거듭 마련되는 것도 그 증거인 셈이다.

3잠깐 다른 데로 눈을 돌려 말머리를 찾아보자. 셰익스피어가 세상을 뜬 것은 1616년인데, 그로부터 200년쯤 지난 뒤에 괴테는 자신의 청년시절 문학활동을 회고하는 「셰익스피어와 불멸성」(Shakespeare und kein Ende, 1815)이란 에세이에서, 셰익스피어가 ‘너무도 풍부하고 너무도 강력하기 때문에’ 그에 관하여 어떤 언급도 충분할 수 없다고 말한 바 있다. 독일 문학도들이라면 아마 누구나 괴테의 이 언명을 듣고, 오랫동안 프랑스 고전주의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하던 독일 문학이 18세기 중엽 이후 단숨에 유럽 문학의 정상으로 올라선 사실을 상기하게 될 것이다. 독일의 문예부흥 과정에서 셰익스피어는 가장 중요한 자극의 역할을 하였다. 한 외국인 작가가 사후 적잖은 시간이 지난 뒤에 다른 나라의 문학에 이처럼 큰 영향을 끼치는 일은 거의 찾아보기 어려운 사례일 것이다. 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던가?

4앞의 괴테 언급에 대답의 핵심이 들어 있다고 생각된다. 즉,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그 시대 독일 문인들에게 너무도 '풍부하고 강력한' 도전이자 영감의 원천이었던 것으로 믿어진다. 봉건체제의 모순이 막바지를 향해 가던 시대에 있는 셰익스피어의 텍스트에 구현된 생동하는 언어와 살아있는 인간 형상을 통해 그때까지의 틀에 박힌 관습이자 형식적 규범으로서의 문학이 아니라 생명이 약동하는 삶 자체의 구현으로서의 문학을 보았을 것이다. 셰익스피어가 가리킨 길을 따라 그들 독일 작가들은 규범 세계에서의 메마른 배회로부터 열정에 넘친 자기 몸의 현실로 돌아온 것이었다. 그럼으로써 독일문학사는 이 시기에 근대 시민문학의 탄생이라는 역사적 과업을 이룩할 수 있었다.

5그로부터 다시 200년이 흘러 지금 우리 앞에는 김수영이 있다. 18세기의 독일과 20세기의 한국이 다르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잠시 독일의 경우를 참조한 것은 진정한 예술가의 고투는 시대와 국경을 넘어 역사에서 전환의 방향등 역할을 할 수도 있다는 점을 확인하기 위해서이다. 물론 김수영의 목소리는 살아생전에 이미 남다른 울림으로 동료와 후배들에게 각성을 주고 영감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는 생전 20년보다 사후 50년 동안 점점 더 열렬하게 작동하는 ‘살아 있는 김수영’으로서 한국문학사의 ‘김수영 이후 시대’를 열어왔다고 말할 수 있다.

6생각해보면 김수영의 시와 산문이 강력하다고는 할 수 있어도 풍부함에 달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의 생애는 풍부함을 이루기에는 너무 짧았다. 겨우 47년의 일생 가운데 그에게 허용된 문학의 시간은 불과 15년 정도였다. 그나마 경제적 빈곤과 정치적 억압의 시대였다. 그의 문학적 성취는 열악한 조건 속에서의 악전고투의 산물이었다. 물론 김수영도 과거로부터 물려받거나 비깥으로부터 넘겨받은 것을 껴안고 몸부림치면서 마침내 ‘김수영’이 되었다. 그 역시도 국내외의 동시대인들과 삶을 공유하고 생각을 주고받으면서 자기를 형성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자신아 다하지 못한 ‘풍부함’의 고지에 이를 것을 후배들에게로 남겨놓았다. 따라서 오늘 우리가 기리고 찬양하는 ‘김수영’에는 그를 잇는 후배들의 50년 노고도 포함된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런 관점에서 나의 편의적인 생각들 몇 가지를 두서없이 말해보고자 한다.

리얼리즘과 난해시

7어느 자리에서 백낙청 선생은 김수영의 시를 「소박한 리얼리즘」으로 규정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 바 있다. 물론 그렇다. 그러나 리얼리즘뿐만 아니라 모든 개념은 그 개념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서 용법이 달라질 수 있다. 어떤 개념이든 그것은 생겨나서 일정하게 의미가 생성되고 널리 사용되는 과정 속에서 역동적인 변화를 겪게 마련이다.

8리얼리즘을 ‘소박하게’ 생각하여 가령 사물을 직접적으로 재현하는 방식이라고 단순하게 정의한다면 그런 의미의 리얼리즘 개념은 당연히 김수영의 시와 관계가 없다. 사실 앞의 백선생의 언급도 김수영 시의 리얼리즘 여부를 가리는 데 주안점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가 강조한 것은 김수영이 4·19 이후 혁명의 퇴보와 군사정변의 등장이라는 암울한 현실을 겪으며 오히려 어떤 근본적 깨달음에 이르렀다는 점이었다. 이것을 볼 때 중요한 지적이다. 하지만 어쨌든 4·19 이후 혁명의 흥분 속에 쓰인 김수영 시의 투명성과 혁명의 배반을 겪으며 쓰인 그의 시의 난해성이 큰 설명으로도 속 시원히 해명되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김수영 문학을 굳이 리얼리즘에 연관지을 필요가 없는 것 아닌가? 김수영 자신도 산문에서 현대성 또는 모더니즘에 대한 언명은 여러 차례 했으나 자신의 문학을 리얼리즘 개념과 연관지어 언급한 흔적은 찾아보기 어렵다.

9나는 백선생의 설명에서 배운 바가 많지만, 그럼에도 이 경우에는 내 생각을 완전히 철회할 만큼 그에게 동조가 되지는 않는다. 이 세계와 현실에 대한 개량적인 이해와 그 미학적 전유(專有)를 리얼리즘이라고 정의할 때, 그런 심층적 리얼리즘에 김수영 시가 도달했느냐를 검토하는 작업은 그가 그 개념을 염두에 두었느냐 아니냐에 관계없이 비평이 마땅히 해야 할 몫이다. 김수영에게서 「현실과의 대결」이라는 리얼리즘의 정신을 보지 않는다면 그의 문학의 핵심을 놓치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현실의 어떤 층위, 어떤 차원과 부딪치든 전투 자세의 철두철미함에서 김수영은 누구보다 치열한 리얼리스트였다고 믿어지기 때문이다.

10이런 전제에서 무엇보다 주목할 사실은 김수영의 문학에서 ‘현실’이 많은 경우 소소한 일상의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그러나 너절하고 비루해 보이는 외관에도 불구하고 ‘김수영 현실’의 일상성은 저급한 트리비얼리즘(瑣末主義)으로 전락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김수영 특유의 가차 없는 정직성과 치열한 자기성찰을 통과한 다음, 거대담론의 상투적 허위와 관성적 허위를 폭로하는 날카로운 무기로 재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이 단순치 않은 전화(轉化)의 과정에는 역설·반어·비약·전도·은폐 등 갖가지 수사학적 수단들이 동원된다. 그 결과 많은 경우 김수영의 시는 손쉬운 상식적 이해를 벗어나 난해성을 띠게 된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사실은 고통의 산물로서의 진정한 난해시와 억지로 꾸며낸 가짜 난해시를 구별하고 후자를 공격하는 데 누구보다 앞장선 인물이 김수영이었다는 점이다.

11그런 점에서 김수영 시의 난해성은 현실의 복잡성과 김수영 의식의 충돌이 빚어낸 불가피한 결과물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동시에 이 지점에서, 너무 고식적인 해석일지 모르나, 그의 시대가 엄혹한 반공법·국가보안법의 족쇄 아래 묶여 있었던 사실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현실이 강제하는 온갖 법적 제약과 제도적 금기를 돌파하여 현실의 심층으로 들어가기 위해 어찌할 수 없이 난해라는 투명 외투(Tarnkappe)로 자신을 보호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아닐까. 시대의 산물로서의 이러한 시를 그는 ‘진정한 현대시’라는 둔사(遁辭)로 불렀다.

김수영과 4·19혁명

12많은 시인들에게 그러했겠지만 김수영의 문학적 생애에서 4·19혁명은 결정적인 분수령이었다. 이 무렵 그의 시는 평소의 딴 시들과 확연히 구별되는, 놀랄 만큼 직접적인 화법으로 독재자에 대한 증오를 토로하고 벅찬 가슴으로 해방의 감격을 노래한다. […]

13이런 의미에서 김수영은 4·19혁명의 직접적인 참여자였다고 말할 수 있다. 혁명은 일차적으로는 각성한 군중이 궐기해서 부패하고 불의한 권력을 폭력으로 무너트리고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는 정치투쟁이다. 그리하여 김수영은 이승만 독재정권의 붕괴에 무한한 환희와 해방의 감정을 가졌던 바, 그러한 감정의 표현 자체가 혁명과정에서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중요한 선전활동이 되었다. 따라서 그러한 선전시가 난해한 언어로 쓰일 수 없음은 자명하다. 그러나 혁명이 퇴조하고 압박이 강화되기 시작하자 그는 다시 현실과의 복잡한 싸움, 즉 난해의 반투명 장막 안으로 들어가 자신을 보호할 수 밖에 없었다. […]

14내 생각에 김수영의 내면을 평생 지배한 것은 외부 현실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특히 6·25전쟁의 고난을 겪은 이후에는 현실세계가 주는 억압과 공포감이 그의 무의식에 상시적으로 잠재해 있었을 것으로 믿어진다. 의용군으로 잡혀가 잠깐 경험한 북한 체제에서는 물론이고 번역이라는 비정규적 생업에 매달려 소시민으로 살았던 남한의 반공체제에서도 그를 가둔 불변의 생존조건은 자유의 결핍과 처벌의 위험이었다. 따라서 김수영은 오늘날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심한 불안감에 늘 시달리며 살았다고 나는 본다.

15거듭된 지적이지만 그의 공포감은 6·25 전쟁 시기 남북한 땅에서 겪은 치명적 경험으로부터 유래했을 것이다. 그런데 김수영의 남다른 점은 공포에 시달리면서도 끝내 공포에 굴복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공포 자체는 오히려 그에게는 진실의 현존을 말해주는 생생한 증거였을 것이다. 마치 박해 속에서 더 깊은 신앙을 얻었던 초기 기독교도처럼 그는 외부세계의 공격성에 두려움을 느끼는 순간마다 자신을 찾아온 진실의 내방을 감각했을 것이다.

16그런데 김수영에게서 우리가 주목할 사실은 이 계시와도 같은 순간에 발하는 그의 언어가 추상적 이념이나 도덕주의적 관념이 아니라는 점이다. 어린이가 엄마의 치맛자락을 붙들고 가면서 자기 손에 닿은 감각의 구체성으로 후일 엄마의 실존을 기억하듯이, 그는 생활 속에서 부딪치는 작고 초라한 디테일에서 실밥처럼 드러나는 진실의 현존을 느끼고 그것을 자동기술 하듯 받아적는 행위로 허위와 강제의 시대 한복판을 통과했다. 후세의 연구자들은 물론 그가 묘사한 비근한 일상의 얼굴 뒤에 감추어진 더 큰 이념들, 가령 자유라는 한 사회의 같은 이념들을 추출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한 비평가의 사후적인 의미부여일 뿐이다.

17그가 보기에 김수영은 비평적 논설도 때로는 시적 언어로 전개했다. 그가 논란을 넘어 지식인 사회 전체의 주목을 받은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1968년 봄 조선일보에서 이어령과 벌인 논쟁을 통해서인데, 돌이켜보면 그때가 김수영 정신의 절정기였다. 그 무렵 부산에서의 강연 「시여, 침을 뱉어라」는 우리나라 문학 역사상 가장 탁월한 비평적 문건의 하나이다. 제목부터가 심상치 않다. 「시여, 침을 뱉어라」가 어떤 사람에게는 문학강연의 제목으로 너무 파격이고 심지어 너무 비속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내가 볼 때는 더할 나위 없이 의미심장한 제목이다. 「눈」이라는 시에도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 기침을 하자/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눈을 바라보며/밤새도록 고인 가래라도/마음껏 뱉자 ». 김수영의 생각의 구조에서 기침을 하고 침을 뱉는 행위는 단순한 신체적 반응이 아니다.

18그것은 김수영의 의식 내부에서 진행되는 혼신의 전투, 즉 공포와의 전투, 거짓과의 전투, 온갖 찌질함이나 비루함과의 전투를 나타내는 증거이자 전투의 물리적 흔적으로서의 움직일 수 없는 부산물이었다.

김수영 — 되기 관여한 것들

19김수영은 글 쓰는 문제만 붙들고 투쟁해서 높은 경지에 이른 시인이 아니다. 그는 결코 글에 갇힌 사람이 아니었다. 물론 시를 쓰는 순간에는 시에 자기 존재 전체를 걸었다고 할 수 있다. 전후의 참담한 폐허와 궁핍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방황하던 술에 젖어들 때 그는 그 책을 읽고 번역을 했으며, 이 과정을 통해 유례없이 눈부신 지적 성장과 사상적 심화를 이룩했다. 물론 번역은 생계를 위한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에 그치지 않고 그는 번역을 통해 동시대 서구의 문예 경향을 섭렵했고, 나아가 하이데거와 프로이트의 일본어 번역본을 밑줄 그어가며 열독했다. 중학 중퇴 학력에 불과한 임화가10대 후반부터 맹렬한 독서와 집요한 지적 탐구를 통해 자기 시대의 이념을 선도하는 위치에 올랐던 것처럼 김수영도 부실한 정규 학교 수업 이후 10여 년간 중단됐던 '진짜 공부'에 자기를 몰아넣었다.

20요컨대 김수영을 만드는 데 그의 외국어 독서가 매우 중요하지만 결정적인 것은 아니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하이데거의 사유와 프로이트의 개념에 도움을 받은 것은 사실이겠지만, 하이데거를 읽었다고 모두 김수영이 되는 것은 아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타인의 경험과 타인의 사유는 ‘자기 것’이 되는 과정을 거치기 이전에는 여전히 남의 것이다. 진정으로 독창적인 결과물이 나오기 위해서는 그 과정에 자신의 '피 흘림'이라는 치명적 봉납(奉納)이 행해져야 한다. 김수영은 하이데거의 문장을 발판 삼아 자신의 사유를 전개한 것이고, 어쩌면 하이데거 없이도 우리가 아는 김수영이 되었을지 모른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21김수영이 내심 좋아하는 선배였다고 알려진 임화와 비교하여 김수영은 한국 문학사에서 어떤 위상을 가질 수 있을까? 앞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임화의 정규 교육은 중학 중퇴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1930년대 식민지 문단에서 일본 유학파와 출신이든 경성제대 출신이든 그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이론적 역량을 발휘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그는 10대 말부터 미친 듯이 독서에 몰입하면서 잠시 '백조'(白潮)의 이상화(李箱和)를 추종하기도 하고 다다이즘 흉내를 내기도 하다가 곧 맑스주의자로서의 자기를 확립했다. 물론 그는 일본 좌파 문학의 학습을 통해 그렇게 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학습한 좌파 이론의 핵심을 견지하면서도 그것을 기계적으로 답습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그는 일본식 맑시즘을 식민지 현실의 내적 필연성 안에서 논리화하고자 끊임없이 고심하였다. 그러한 고뇌의 결과 탄생한 것이 일제 강점기의 신문학사론이고 해방 후의 민족 문학론이다. […]

22임화의 후배로서 김수영이 서양 시와 서양 이론을 읽고 번역할 때 임화가 가졌던 것과 같은 정도의 대타의식(對他意識) 을 지녔었는지 내게는 의문이다. 어쩌면 그러지 못했기 때문에 김수영의 문학이 임화보다 서구 문학의 원본에 더 가까운 내용을 갖게 되었는지 모른다. 요컨대 임화에 비한다면 김수영에게는 전통적인 것의 전개 과정에 대한 '역사적 설계'가 없었다. 유명한 「거대한 뿌리」나 「이 한국 문학사」 같은 시는 우리 역사에 대한 그의 통찰을 보여주기보다 민족의 과거에 대한 그의 학습 부족을 드러낸다. 그는 만해·소월·지용 등 선배 시인들을 체계적으로 읽은 흔적을 별로 남기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이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의 청소년기인 1930년대에는 그의 세대에게 우리 문학과 역사를 제대로 공부할 시간과 여건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당시에는 우리 문학과 역사에 대한 연구의 축적 자체가 지극히 빈약한 상태였다. 어쩌면 이런 점들이 거꾸로 한국시의 낡은 관행과 굳어진 타성으로부터 그의 자유를 가능케 했는지 모른다.

23그러나 그는 김광섭·김현승·서정주·박목월 등의 선배뿐만 아니라 신동엽을 비롯한 동시대의 동료와 후배들의 시를 부지런히 읽어서 최선을 다해 시평을 썼다. 그의 이론공부와 현장비평 사이에는 언뜻 보기와 달리 긴밀한 연관성이 있을 것이다. 김수영은 하이데거와 프로이트를 깊이 읽되 결코 읽은 체하지 않으면서 어디까지나 현재에 밀착된 시인으로 활동했으며, 오직 그 밀착을 통해서만 한국시의 ‘김수영 이후’를 만들어냈다. […]

김수영과 모더니즘

24리얼리즘과 모더니즘, 민족과 계급 등 여러 개념들은 알다시피 서양에서 수입된 것이다. 그런데 앞에서 말한 것처럼 어떤 개념이든 일정한 역사적 맥락 속에서 형성되고 발전하는 것이며, 따라서 누가 어떤 문맥에서 사용하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고 뉘앙스에 변화가 생기게 마련이다. 물론 개념이 무한대로 확장될 수 있는 것은 아니어서, 가령 도식적 관념주의나 몽상적 낭만주의는 어느 경우에나 리얼리즘과 적대적이다. 이런 점을 전제하고 김수영과 모더니즘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보자.

25서구문예에서 모더니즘은 19세기 후반부터 전간기까지 출몰했던 여러 새로운 예술사조들을 포괄해서 가리키는 것이 보통이지만, 그중 어느 특정 사조를 지칭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모더니즘은 상징주의·표현주의·초현실주의·이미지즘·주지주의 등을 뭉뚱그리는 개념일 수도 있지만, 그중 어느 하나를 주로 가리킬 수도 있다. 가령 1930년대의 김기림과 최재서(崔載瑞)는 영문학 전공자답게 주지주의를 중심으로 모더니즘을 논한 바 있다.

26그런데 왜 이 시기 서구 문학 예술에 모더니즘으로 불리는 변혁이 일어났는가? 생각해 보면 이 시기 예술상의 변화는 그 근본적인 변화의 징후일 뿐이다. 표면 아래 심층적인 곳에서 진행된 세계 자체의 변화와 이와 결부된 세계관의 전환에 주목해야 하는데, 중세 봉건사회를 무너트린18세기 근대 시민혁명이 이제 마지막 국면에 이르러 세계와 우주에 대한 인간의 이해에도 근본적인 전환을 가져온 것이다. 미학적 모더니티로 묶일 수 있는 각종 새로운 문예사조들은 자기들 세계의 동요와 위기에 대한 서구인의 반응이자 위기의식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고, 그런 점에서 서구 모더니즘은 그 나름으로 역사적 필연성의 소산이다.

27그러나 한국 사회와 문학은 상식적으로 보더라도 서구와는 전혀 다른 역사의 시간 속에 있다. 알다시피 20세기 전반기 이 나라는 ‘식민지 근대화’의 모순을 겪고 있었다. 어쩌면 서구발 일본 경유의 모더니즘이 1930년대 문단에서 점차 중심적 지위를 획득하게 된 사실 자체가 ‘식민지 근대화’의 형용모순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일지 모른다. 나는 이 시기를 언제나 착잡한 눈으로 바라볼 수 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정지용·김기림·이상·박태원·최재서 등이 이룩한 문학적 성숙은 시대현실의 부정성이라는 어두운 배경 안에서 양가적 의미를 갖는 성취이기 때문이다. 한국 모더니즘은 발생 초기부터 오늘날까지 이 가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고 생각한다.

28김수영도 넓은 의미에서는 이 모더니즘의 자장 아래에서 성장한 시인이다. 자타가 공인하듯 그의 지적인 원천과 사유의 뿌리는 서구문학이고 서양 사상이었다. 아주 어려서 한문 공부를 했다고 하지만 초등학교 입학 이후 일본어로 학습을 했고, 청년 시절 이후엔 주로 영어를 읽고 번역했다. « 일본말보다는 더 빨리 영어를 읽을 수 있게 된,/몇 차례의 언어의 이민을 한 내가/우리말을 너무 잘해서 곤란하게 된 내가 », 이것은 「거짓말의 여운 속에서」란 작품의 한 구절인데, 이 표현에는 거의 평생 토착문화와 모국어에 뿌리 내리지 못하고 이방의 언어들 사이를 유랑해야만 했던 ‘언어 디아스포라’로서의 쓰라린 자의식이 반영되어 있다.

29그러나 남의 것을 받아들이되 껍질만 받아들이는 데 그치는 사람과, 받아들인 남의 것을 소화해 자기 알맹이의 일부로 만드는 사람의 구별은 본질적으로 중요하다. 일찍이 식민지 내지 반(半)식민지에서의 선진 외래문화 도입이 제기하는 문제를 날카롭게 인식하고 논리적으로 해명한 인물은 이 글이 거듭 호출하는 임화인바, 그는 유명한 논문 「신문학사의 방법」(1940, 『문학의 논리』 수록)에서 « 문화의 이식, 외국 문학의 수입은 이제 일정 한도로 축적된 자기 문화의 유산을 토대로 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 문화 이식이 고도화되면 될수록 반대로 문화 창조가 내부로부터 성숙한다 »라고 정확하게 갈파하였다.

30외국어/외국 문화와 그 나름의 전투를 통해 김수영이 수행한 작업은 바로 임화가 말한 ‘내부로부터의 성숙’이었다. 서구 모더니즘의 한국적 수용이라는 차원에서 그의 역할도 그런 관점에서 평가할 수 있을 텐데, 오래전 「김수영론」에서 내가 다음과 같이 말한 것도 그 점을 지적한 것이었다. 또한 김수영이 평론 「참여시의 정리」에서 신동엽을 언급하는 가운데 « 50년대에 모더니즘의 해독을 너무 안 받은 사람 »이라고 설명한 것도 모더니즘에 대한 그의 적극적 관계를 보여준다고 할 것이다.

한국 모더니즘의 역사에 있어서 김기림이 그 씨앗을 뿌린 사람이라면, 김수영은 모더니즘을 철저히 실현하는 과정에서 한편으로 모더니즘을 완상하고 다른 편으로 그것에서 벗어나는 틔워놓았다. 김수영은 한국 모더니즘의 허위와 불완전성을 철저히 깨닫고 이를 통렬하게 공격했으나, 그의 목표는 진정한 모더니즘의 실현이지 모더니즘 자체의 청산이 아니었다. 다시 말하면 그의 모든 문학적 사유는 넓은 의미에서 모더니즘의 틀 안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의 모더니즘은 ‘진정한’ 모더니즘으로 나아가고자 한 것이었기 때문에 — 다른 모든 진정한 사고와 행동의 역사적 작용이라고 볼 수 있듯이 — 한국 모더니즘의 기초를 분해하는 효소로서 작용하였다. 여기에 한국 모더니즘 역사에서 김수영의 역설적 위치가 있는지도 모른다.1

31돌이켜보면 그의 청소년 시절이 이 땅의 사회문화적 환경은 굳이 서당에 가서 한문 고전을 배우지 않았더라도 봉건유교적·가부장적 사상과 가치관에 길들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의 청년기는, 적어도 지식계층에서는 러시아혁명 이후의 사회주의나 여성해방론 같은 신사조가 일본 또는 중국을 통해 물밀듯 들어오던 ‘급진적 계몽’의 시대이기도 했다. 김수영의 여성에 대한 태도를 보면 토착 봉건문화와 외래 선진 사조 간의 공존과 유착 및 불가피한 길항 등 온갖 모순적 요소들의 혼합과 착종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아내를 거의 언제나 ‘여편네’로 호칭하고 심지어 우산대로 쳤다고 고백하면서도, 동시에 여성들 일반과의 관계에서 자신보다 20년 아래인 나 같은 사람보다 훨씬 더 자유롭고 개방적인 자세를 보여주기도 하였다. 이런 모순들을 양보 없이 살아내면서 남김없이 드러낸 것이야말로 남이 못한 김수영의 독자적인 위업이다.

32강조하거니와 그는 자기 시대를 누구보다 철저히 산 사람이다. 시대 자체가 모순에 가득 차 있었으므로 그의 삶과 문학도 그러했다. 그는 항시 의심의 눈으로 현실을 바라보았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가차 없는 반성적 시선으로 들여다보았다. 시에서나 산문에서나 그가 가장 자주 사용한 단어 중의 하나는 ‘거짓말’이다. 그는 끊임없이 자기 내부의 속임수를 적발해서 스스로 고발해 마지않았다. 우리 문학사상 거의 유례가 없다 할 만한 이 도저한 정직성과 불굴의 치열성이야말로 김수영으로 하여금 모든 사회적 허위 의식을 공격하고 기존의 껍질뿐인 문예 사조의 구속에서 벗어나게 만들었다. 김수영은 때로는 철저한 리얼리스트, 때로는 탁월한 모더니스트지만 결국 양자를 한 몸에 구현한 인물이자 그 모두를 넘어선 존재, 즉 가장 깊은 뜻에서 자기 자신에 도달한 시인이었다. 문학의 길에 들어선 우리 모두에게 언제나 새로운 목표로 다가오는 것이 바로 ‘자기자신 — 되기’라고 할 때, 김수영은 여전히 우리의 스승으로 앞에 서 있다.